본문 바로가기
기억 한 페이지

서울 도심 위를 달리던 고가도로, 청계고가는 왜 사라졌을까

by 벨키오 2026. 7. 12.

요즘 청계천에 가면 맑은 물이 흐르고 나무 데크 위로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청계고가도로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저녁이면 조명이 켜진 물길을 따라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도 많고, 주말이면 아이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이 다리 밑 그늘에 앉아 쉬어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풍경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이 자리에는 물이 아니라 자동차가 가득 흐르고 있었습니다.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고가도로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서울 도심을 관통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청계천을 걷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야기일 수 있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이곳은 전혀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도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어떤 이유로 철거되어 지금의 청계천이 되었는지 쉬운 말로 살펴보겠습니다.

서울 도심 위를 달리던 고가도로, 청계고가는 왜 사라졌을까
서울 도심 위를 달리던 고가도로, 청계고가는 왜 사라졌을까

청계천을 뒤덮은 고가도로, 근대화의 상징이 되다

청계천은 원래 서울 도심 한복판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던 하천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 하천 주변에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낙후된 지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서울시가 선택한 방법은 하천 위를 콘크리트로 덮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복개 공사로, 이미 일제강점기와 1955년에도 일부 진행된 적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58년부터였습니다. 이후 몇 차례로 나뉘어 진행된 공사는 광교에서부터 성동구 신답철교 부근까지 이어지며 1978년 무렵에야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또 하나의 큰 구조물이 세워졌는데, 바로 청계고가도로였습니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도로와 지하도, 상가 건물 등을 잇달아 지으며 별명이 불도저 시장일 정도로 도시 개발에 열심이었던 인물입니다. 남산 1호 터널이나 광화문 지하도, 명동 지하도, 세운상가처럼 지금도 남아 있는 여러 시설물이 이 시기에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청계천에 복개도로와 고가도로를 함께 짓는 계획을 세웠고, 건축가 김수근에게 자문을 구해 도로의 형태를 다듬었습니다. 김수근은 서울을 종로 중심의 방사형 도시가 아니라, 서울에서 인천까지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구조로 바꾸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청계고가도로는 그 구상 속에서 도심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축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공사는 1967년 8월에 시작되어 1969년 3월에 첫 구간이 문을 열었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구간을 넓혀 가다가 1976년 8월 15일에 전 구간이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된 고가도로는 길이가 오륙 킬로미터에 이르렀고, 폭은 십육 미터로 왕복 네 개 차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로 시작점에 있던 삼일빌딩의 이름을 따서 삼일고가도로라고 불렸는데, 1984년에 서울시가 청계천 복개 도로 위에 놓인 구조물이라는 상징성을 살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청계고가도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가도로는 이후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과 근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여겨졌습니다.

 

도심을 가로지르던 자동차 전용도로, 그 이면의 이야기

청계고가도로가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교통 문제 해결이었습니다. 당시 서울 도심에서 동쪽 끝인 마장동까지 자동차로 이동하려면 신호등이 있는 평면 도로를 따라 한참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호를 받지 않고 곧장 달릴 수 있는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도심을 가로지르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고, 종로나 을지로 같은 주요 도로의 교통 흐름도 한결 나아졌습니다. 이천 년대에 들어서는 하루에 자동차 십육만 대가 오갈 정도로 서울 도심 교통의 핵심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화려해 보이는 이 도로 밑에는 아픈 사연도 함께 있었습니다. 청계천 주변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판잣집 주민들은 복개 공사와 고가도로 건설 과정에서 살던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봉천동과 신림동, 상계동, 그리고 지금의 성남시에 해당하는 광주대단지처럼 서울 외곽의 낯선 지역으로 강제로 옮겨졌습니다. 정든 삶의 터전을 잃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삶을 꾸려야 했던 사람들의 처지는 화려한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반면 판잣집이 있던 자리와 그 주변에는 새로운 맨션과 상점가가 들어서면서, 같은 공간 안에서도 누군가는 밀려나고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를 얻는 극명한 대비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청계천 주변에는 전자 부품이나 기계 공구, 의류 도매상가처럼 오래된 상권이 밀집해 있었는데, 짐을 싣고 내리는 차량들이 도로에 늘어서면서 오히려 교통 정체를 심하게 일으키는 곳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고가도로 자체도 낡아 갔습니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노후화되며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고, 복개된 하천 아래로는 오수와 폐수가 흘러들어 악취가 심해졌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모습 자체가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지적도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근대화의 상징으로 칭송받던 도로가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도심의 골칫거리로 여겨지게 된 셈입니다.

 

철거와 복원, 청계천이 다시 흐르다

이렇게 쌓여 가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는 결국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그 아래 묻혀 있던 하천을 되살리는 큰 결정을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도심의 자랑거리로 여겨졌던 구조물을 걷어 낸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십육만 대나 다니는 도로를 없애면 극심한 교통 대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우회 도로와 대중교통 이용을 유도하는 대책을 함께 마련하며 공사를 밀어붙였습니다. 철거 공사는 2003년 7월 1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서울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구조물을 걷어 내는 일인 만큼 교통 대책과 상인들의 이주 대책을 함께 마련해야 했고, 공사는 신중하게 단계별로 진행되었습니다. 콘크리트로 덮여 있던 복개 구조물과 그 위의 고가도로가 차례로 사라지면서,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철교에 이르는 약 오점팔사 킬로미터 구간에 걸쳐 옛 하천의 모습을 되살리는 청계천 복원 사업이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이 공사는 2005년 9월 30일에 마무리되었고, 그다음 날인 10월 1일 시민들에게 새로운 청계천이 공개되었습니다.

 

복원된 청계천에는 예전의 콘크리트 고가도로 대신 맑은 물이 흐르고, 산책로와 다리, 조명 시설이 새롭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물길이 다시 생기면서 주변 공기가 한결 시원해졌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고, 인근 상권 역시 관광객과 시민들의 발길이 늘어나며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다만 개발 시대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신설동 부근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는 옛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세 개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온전한 형태 하나와 일부만 남은 것 하나, 기둥만 남은 것 하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교각은 개발 시대의 자랑과 그 이면의 애환을 함께 기억하자는 뜻에서 일부러 철거하지 않고 남겨 둔 것으로, 2013년에는 서울시가 지정하는 미래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근처에는 청계천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청계천박물관도 자리하고 있어, 지금은 사라진 고가도로의 모습과 복원 과정을 사진과 자료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도로였던 자리에 물이 흐르고, 콘크리트 대신 풀과 나무가 자라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한때 서울의 근대화를 상징했던 거대한 도로가 있었고, 그 도로가 세워지고 다시 사라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선택이 함께 얽혀 있었습니다. 도로가 필요해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사람들, 그 도로 덕분에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훗날 그 도로를 걷어 내고 다시 물길을 되찾기로 결정한 사람들까지, 청계천이라는 한 공간을 두고 시대마다 서로 다른 선택이 쌓여 온 셈입니다. 신설동의 존치교각 앞에 잠시 서서, 콘크리트 다리 위로 자동차가 달리던 그 시절의 서울을 한번 상상해 보시는 것도 좋은 산책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