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억 한 페이지

100년의 역사가 멈춘 자리: 경주역 폐역 이후의 이야기

by 벨키오 2026. 7. 12.

100년 넘게 한 도시의 관문 역할을 하던 기차역이, 어느 날 새로 놓인 철길 앞에서 조용히 문을 닫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100년 넘게 경주를 지킨 관문, 오늘은 1918년부터 2021년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주의 얼굴 역할을 했던 경주역과, 그 역이 문을 닫은 뒤 도시 중심이 어떻게 옮겨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00년의 역사가 멈춘 자리 경주역 폐역 이후의 이야기
100년의 역사가 멈춘 자리 경주역 폐역 이후의 이야기

100년이 넘는 세월, 경주의 얼굴이었던 역

경주역은 1918년 11월 1일, 협궤선 보통역으로 처음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지어진 역사는 우리나라 전통 방식으로 지은 목조 건물이었는데, 이후 1936년에 선로 폭을 표준궤로 바꾸는 공사를 하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형태의 역사를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 지은 역사는 한옥 양식을 그대로 살려 지붕의 곡선과 처마 모양이 마치 전통 건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이 때문에 오랫동안 경주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꼽혔습니다.

 

현관 지붕은 처마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간 곡선 형태로 마치 오래된 탑의 지붕돌을 닮았고, 본관 지붕은 가운데가 한 단 더 높게 솟은 모양을 하고 있어 멀리서 봐도 다른 근대 건축물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을 주었습니다. 역 안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27년에 세운 급수탑도 있었습니다. 이 급수탑은 나중에 폐역이 될 때까지도 실제로 물을 공급하는 데 쓰인,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급수탑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으로 쓰이던 시설이었다고 합니다. 역 앞 광장에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삼층석탑도 자리하고 있었는데,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1936년 경주역 앞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경주역은 단순히 기차를 타고 내리는 공간을 넘어, 역사와 건축, 문화재가 한데 모여 있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경주역 주변은 오랫동안 경주 구시가지의 교통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역 앞에는 성동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대릉원 같은 유적지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경주역은 기차에서 내린 여행객이 바로 경주 시내 관광을 시작할 수 있는 관문이었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오랜 세월 익숙한 생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주역을 오가는 열차의 종류도 계속 늘어났습니다. 1979년에는 서울과 경주를 잇는 새마을호 열차가 새로 운행을 시작했고, 1992년에는 새마을호가 경주를 거쳐 울산과 포항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철도 물류의 중심이 바뀌면서 2007년에는 화물 취급이 중지되어, 이후로는 여객 전용역으로만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철도공단이 남긴 자료를 보면 경주역을 이용한 사람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해마다 100만 명을 넘었고, 2016년부터 2019년 사이에도 한 해 95만 명 이상이 이 역을 거쳐 갔습니다. 코로나19가 퍼진 2020년에는 이용객이 60만 명대로 크게 줄었지만, 폐역 직전인 2021년에도 7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역을 이용했습니다.

 

유네스코의 권고와 철도 노선의 변화, 폐역으로 이어지다

경주역이 문을 닫게 된 배경에는 문화재 보호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경주는 신라의 옛 도읍으로 도시 전체가 유적지와 다름없는 곳인데, 유네스코 쪽에서 경주 시내를 지나는 철로가 문화재 보호에 좋지 않다는 의견을 내고 노선을 시내 바깥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 권고와 함께 경부고속철도 건설 계획이 맞물리면서, 경주 시내에서 떨어진 건천읍 화천리에 새로운 역을 짓고 그곳으로 철도 기능을 옮기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2010년 11월 1일, 경부고속철도 2단계 구간이 개통하면서 새 역이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기존 경주역과 이름이 겹치지 않도록 이 새 역은 신경주역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속열차만 이 신경주역에 정차하고, 무궁화호 같은 일반 열차는 여전히 시내에 있는 옛 경주역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두 역이 함께 운영되었습니다. 이후 동해선과 중앙선의 선로를 시내 바깥으로 옮기고 복선 전철화하는 공사가 이어졌고,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2021년 12월 28일을 끝으로 경주역은 결국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1918년 개관 이후 103년 동안 이어지던 경주역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일반 열차를 포함한 모든 여객 기능이 신경주역으로 완전히 옮겨 갔습니다.

 

역이 사라지면서 이름을 둘러싼 논의도 뒤따랐습니다. 시내에 있던 원래 경주역이 사라졌는데도 정작 경주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된 역은 여전히 신경주역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혼란스럽다는 의견이 지역 안팎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여론을 반영해 경주시는 2022년 1월,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반대하는 의견이 거의 없었던 만큼 곧이어 지명위원회를 열어 역명 변경 절차를 공식적으로 밟기 시작했고, 같은 해 12월 국토교통부 역명변경심의위원회에서 이름을 바꾸는 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2023년 2월 국토교통부 고시를 통해 신경주역이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경주역으로 바뀌었지만, 곧바로 모든 시설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차표 예매 시스템이나 안내판 같은 실제 시설과 전산 자료까지 새 이름으로 완전히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려, 그해 12월 28일이 되어서야 안내 표지와 승차권 예매 시스템, 열차 안내 방송까지 모두 경주역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옛 경주역이 지녔던 이름과 상징성을 새로운 역이 이어받기까지, 이름을 둘러싼 절차만 꼬박 2년 가까이 걸린 셈입니다.

 

폐역 이후, 새로운 쓰임새를 찾은 도시의 공간

문을 닫은 경주역은 헐리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한국철도공사는 폐역 이전인 2013년에 이미 경주역 건물을 철도기념물로 지정해 놓은 상태였고, 이런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폐역 이후에도 역사 건물과 급수탑, 그리고 역 앞을 지키던 무사고기원탑까지 함께 그대로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이후 지역에서는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어졌고, 그 결과 2022년 12월 2일, 옛 경주역은 경주문화관1918이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기차를 기다리던 대합실과 승강장이 있던 자리가 전시와 문화 행사를 여는 공간으로 바뀐 것입니다.

 

역 건물뿐 아니라 기차가 다니던 철로 부지를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논의되었습니다. 국가철도공단은 동해남부선과 중앙선 가운데 경주시 구간에 해당하는 폐선 부지를 몇 개 구간으로 나누어 민간의 아이디어를 받는 공모를 진행했습니다. 오랫동안 기차가 다니던 길을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걷거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려는 시도인 셈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낡은 시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오래 품어 온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계속 살려 나가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주역이 문을 닫으면서 경주 시내의 교통 중심축도 자연스럽게 옮겨 갔습니다. 예전에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시내 한복판으로 이어지던 동선이, 이제는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신경주역, 즉 지금의 경주역을 거쳐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경주역에서 시내와 보문관광단지 등 주요 지역으로 이어지는 대중교통을 확충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 경주에 노면전차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노면전차가 완공되면 지금의 경주역에서 경주 시내와 보문관광단지 같은 주요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이 한결 편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는 옛 경주역 부지를 두고도 여전히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지역 언론에서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역사 건물과 급수탑, 무사고기원탑 같은 부속 시설을 단순히 관람 공간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새로운 먹거리로 이어질 수 있는 방식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100년 넘게 이어진 경주역의 역할이 새로운 역과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옮겨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한 도시의 중심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이동하고, 또 남겨진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다시 쓰이는지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습니다.